약사공론

경구제

2017.01.23 (월)

조심스러운 가을

차의과학대학교 약학대학 사회약학실 손현순 교수

우리의 오늘은 지나온 어제가 아니기에 마주하는 매 순간이 그저 낯설다. 밖으로는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이고 안으로는 흘러가는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머리를 한 바퀴 돌려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산과 나무와 풀들은 색깔만 바꿔갈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항상 쏜살같다는 말로 표현하던 사계절이 지금처럼 참 더디 변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에 나는 놀라고 있다. 많은 것이 응축된 시어이기도 한 ‘가을’은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시간이라고 믿었었는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가 보다. 이번 가을은 마음 설레는 낭만이 자리하는 시간은 아닐 것 같다.

게을러서도 아니고 나쁘게 살아서도 아닌데 어느 날 ‘툭’하고 떨어지는 낙엽이 우리 삶의 언덕 위에 하나씩 둘씩 쌓여가는 것이 가을이라는 것을 새로이 알았기 때문이다.

‘많이 힘들어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 동안 주변에서 수없이 들었었던 말들인데, 동이 터오는 새 아침을 신선함과 희망이 아닌 먹먹함과 고통으로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하루를 살아낼 힘을 주세요’ 하는 어머니의 새벽기도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 오십년이 걸리기도 한다.

책을 읽고 스스로 노력한 내면의 깊이로 인해 누구보다도 타인을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그 동안 얼마나 착각하며 살았었는지, 실제 경험이 아닌 머릿속으로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책 밖으로 나와야 하는 가을이다.

어느 날 계획과는 달리 마주하게 된 그 무엇이 우리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라 하지만,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작디작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새벽 양재천 길을 걷는다.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진한 풀 냄새, 평화롭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 길고 긴 생명력을 휘감고 있는 칡덩굴들. 우리 곁의 이런 자연들과 분리해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 터이니, 이 가을을 정녕 마음조차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힘을 빼기로 하자.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더 부유하다고 그래서 자연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자연주의 사상가의 삶을 닮고 싶은 오늘이다. 내 밖의 해야 할 일과 내 안의 평온을 찾는 일.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고민도 깊어진다. 내가 과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지식이라는 것이 언제나 진리는 아니어서 내가 전달할 지식은 어떤 것들이고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함께 배워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할지에 대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행여 내가 가진 생각에 대한 견고함으로 내 방식대로 가르치려는 욕구가 있는 건 아닌지, 나의 욕망이 진정 학생들을 위한 가르침보다 앞서는 것은 아닌지, 나를 객관화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이제는 직업을 빼 놓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탄식이 많다. 지식 또한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다른 사람과 비교한 성과의 크기가 나의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금 낫거나 부족한 것이 기쁨도 되고 절망도 되는 지금, 끝없는 욕망을 자극하며 강요되는 무한경쟁은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갈등은 본연의 문제를 놓치게도 하고 공동체적 우리 삶의 목표를 잊어버리게도 한다. 그러니 점차 선선해지는 날씨만큼 우리 머리도 조금씩 차가워져야 할 것만 같다.

맹자의 말씀 중에, 사람에게는 남의 스승되기를 좋아하는 병이 있는데 대개는 자기가 가르칠 만한 사람을 좋아하고 가르침을 받을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일을 했던 임금에게는 반드시 함부로 부르지 않는 신하, 자신을 반성하게 할 만큼 직언과 충언을 할 수 있는 신하, 몸소 찾아가 의견을 물을 정도로 덕과 지혜가 높은 신하가 있었으며, 그러한 신하가 있었기에 임금이 자만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며 신중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하였다. 이 시대에도 진정한 스승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새겨야 할 귀한 말씀이다.

이 가을 나는 학생들 앞에 서겠지만 가르침을 받는 한 학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의 설익은 말이 누군가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무엇이 옳고 그르다 말하는 것조차 많이 조심스럽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소심한 것일까?

여하튼 가르침을 받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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