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이가탄한국약사문학상 당선작

제3회 한국약사문학상 수필부문

[ 대상 ]

가을이 남기고 간 것들

곽태문약사

곽태문약사
(수원중앙병원)

스산한 바람과 뒹구는 나뭇잎 소리에,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살던 나에 대한 그리움이 잠을 깬다.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어느 날, 나는 알 수 없는 몸살을 앓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병이 또 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가을이 지나면, 삭막한 겨울이 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 계절을 붙들고 싶어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가을은 삶의 모든 것들이 지혜롭게 농축되어 있는 거짓 없는 삶의 일기장 같은 것이다. 풍요로운 결과를 얻기까지의 성실한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를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일을 알차게 준비 한다면, 눈보라 치는 겨울도 두렵지 않으리라.

가을이 주는 의미를 잘 깨달아, 내 삶이 더 바람직하게 변하기를 바라기에, 나는 이 계절을 아프도록 좋아하는 것이다.

가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붉게 물든 단풍잎일 것이다. 그러나 왠지 단풍잎을 바라보면 아름다움 보다는 서글픈 느낌이 앞선다. 아침과 저녁의 심한 온도 차이를 잘 극복하고 곱게 물들었건만, 이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치 마지막 불꽃을 보는 것처럼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곱게 물든 단풍잎에서 나는 배운다. 우리의 삶도 하루, 하루의 시련을 잘 극복하고 완전히 연소 시킬 때 아름답고, 곱게 물들어 간다는 걸.
그렇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남김없이 나를 태울 수 있을 것이고, 저 단풍잎처럼 나도 곱게 물들어 가리라. 나이 들어가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익어가는 것이 될 테니까.

낙엽 뒹구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한번쯤 시인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유 모를 쓸쓸함에 외투 깃을 세우면서 낡은 벤치에서 홀로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눈물겨운 모성을 배운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보잘 것 없는 나뭇잎도 다음 새싹을 틔우기 위해 자기를 던지는 모습에서 위대한 자연속의 모성을 배운다.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나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 갈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함께 어울리어 살라고 말없이 이야기 한다.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라한다. 그게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랑일 것이다. 그 자리에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자연에 대한 공존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어찌하여도 우리는 자연의 부분 집합이니까.

상상 밖의 혹한, 폭염 ,홍수, 오존층 파괴 ... 이런 것들이 자연과의 균형과 조화를 무시한 인간의 이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우리가 만든 지구 온난화다.

자연 파괴가 가져다 준 재앙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무디어진 양식일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는 가을이 되길 바라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연이 보여주는 끝없는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애처롭게 울고 있다. 무작정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보름달이 은은하게 대지를 적시고 있다. 밤바람이 귓불을 스쳐가고, 나는 무엇에 잠시 홀린듯 멍하니 서있었다. 생각 못했던 그리움이 가슴 한 복판을 밀치고 나온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일까?

이루지 못한 것,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애틋함일까?
아니면 지나간 것, 흘러가버린 것에 대한 집착일까? 그러나 그리움이 있기에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사람은 성장과 성숙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은 묘하게 어른을 한순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어 무디어졌던 감정들을 쏟아내, 그 순간만은 모두 착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다.
눈물이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듯, 그리움도 좋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거의 오염되지 않는 맑은 생각 속에서 살지 않았던가? 가을은 맑고푸른 하늘과 함께 우리 곁에서 그렇게 인도하는 좋은 친구 같은 계절인 것이다.

황금 들녘을 바라보거나, 열매가 맺혀있는 과일나무들을 보면, 가을은 확실히 결실 의 계절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정성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현재의 결과를 얻 기 까지 흘린 땀과 눈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과정과 결과의 함수 관계가 꼭 일치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가을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흔희들 삶에는 정답이 없고 각자의 필요에 의한 모범답안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집착해, 결과만 좋으면 성공했다고 이야기 하고 그런 열병이 사회를 멍들게 하기도 한다.

특히 정정당당해야 할 스포츠 분야에서 결과 중시 풍조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면 모든 사람이 열광하게 되고 이성을 잃어버린 일이 다반사다. 깔끔하지 못한 배려에 기록은 남고, 세월이 흐르면 씁쓸한 기억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그러나 삶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한 것이다. 과정 속에 그 사람의 포장 되지 않는 진실을 엿볼 수 있으니까. 논두렁을 걸어가는 농부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살을 본적이 있다. 말이 주름살이지, 깊은 근심이 배어있는 수심살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힘들어도 결과에 상관없이 성실하게 땀방울을 닦으면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간다. 가을에는 그런 성실한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나는 가을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 과정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농부의 모습에서 성실한 삶의 자세를 배웠고, 붉은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시련을 잘 극복해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연륜의 의미를,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끝없는 사랑을 배웠다. 어디 그뿐인가? 무엇인가 그리운 마음을 갖게 하여, 잊어버린 나를 찾게 하는 계절, 그동안의 노력을 평가 받 고 매듭지어 내일을 준비하게 하여 사람을 성장과 성숙하게 만드는 계절, 그래서 이 계절에 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남기고 떠나는 가을이 있어 우리들 삶이 쓸쓸하지 않고, 풍요로워지는 것이리라.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서, 내 모습이 붉디붉은 단풍잎처럼 곱게 물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 비록 내 삶이, 세찬 바람에 떨어져 거리를 뒹구는 작은 나뭇잎이 된다해도, 긴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 남은 가을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깊게 물들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