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약국수기 당선작

제5회 약국수기 공모전

[ 대상 ]

‘북해의 별‘ 그리고 빨간 소목비누

이미선약사

이미선 약사
(건강한약국)

'약사님. 북해의 별 4권까지 다 봤으니 나머지 빌려주세요. 유리핀이 너무 잘생겼어요.
완전 내 이상형 이예요.'
'책 빌리는 거 무료 맞지요?'
'참 예쁜 소목비누 만들기는 언제 해요? 저번에 만든 비누는 같이 일하는 언니들한테 다 뺏겼어요. 하하하'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의 찰랑대는 단발머리 순희씨가 조잘거리며 들어온다.
순희씨는 성매매 집창촌에서 일하는 성매매여성이며 우리약국 단골환자이다.
'북해의 별'은 건강한 약국 안에 있는 마을문고인 '건강한 문고'의 대여순위 1위인 만화책이다. 샤방샤방한 등장인물들과 목숨을 건 사랑이야기가 밤새도록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만드는 행복한 만화책이다. 가슴 설레면서 몇 번이나 읽었던 나의 일등 애장만화이기도 하다.
소목비누는 천연비누 만들기 수업시간에 만들고 있는 비누 중 한가지 이다. 맑고 붉은 빛이 고운 소목비누는 정열의 비누라 불리며 천연비누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저 밑바닥의 삶 , 그래서 대충 막 살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동네인 이곳은 미아리텍사스...흔히 말하는 성매매집창촌이다. 집창촌을 들어오는 골목에서 ‘건강한 약국’을 시작하여 이곳 사람들과 더불어 보낸 세월이 이십 여 년이다.

사람들과는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동자를 가진 친구들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편이 되고 싶어 많은 몸짓으로 꽤 긴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도 조심스럽고 아직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어렵다.그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로 향하는 기나긴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있는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 때때로 내게 묻곤 한다.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일 년 동안 사회복지공부를 하여 사회복지사 1급자격증을 땄다. 내 소망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가게 되었음이 너무나 신나고 자랑스러워 깔끔한 액자 안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넣어 약사면허증 옆에 걸어놓았다.

'어, 사회복지사도 같이 하세요?'아직은 사회복지사라는 자격이 어떤 의미로 일상생활에 쓰이는 지 익숙지 않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질문도 많이 받았다.

시골에 계신 노부모님이 노인 장기요양등급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어보는 친구에게 건강보험공단에서 신청하면 며칠 뒤 실사가 나오고 어찌어찌 진행된다는 답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감사해요, 어머니께서 3등급 받으셨어요. 재가급여처리가 되어서 요양보호사가 집으로 오시니 두 분 생활이 훨씬 편해졌어요.’

'약사님, 정말 고맙습니다.'그렇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나의 마음 한구석이 늘 개운하지 않았다.

약국가까이에 작은 공간을 구해서 지친 사람들이 편안히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는 상담센터를 만들고 싶었다. 팍팍해진 삶에 시원하고 싱싱한 물을 흐르게 하고 싶었다. 햇살 받아 빛나고 찰랑거리는 물이 넘쳐흐르는 물길이 되고 싶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삶은 참 무거웠다.좀 그럴싸한 공간의 상담센터만을 꿈꾸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어깨에 힘주고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속물스런 모습의 약사이자 사회복지사를... 많이 부끄러웠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바깥을 의식하는 겉치레가 내 머릿속 깊은 곳에 꽤 많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삶의 길이 무엇인가, 반짝이는 원목가구를 갖춘 화려한 상담센터를 원했던 것인가,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이런 저런 많은 생각들이 나를 이끈 곳은 ’처음으로 돌아가자‘ 였다.

크고 거창한 상담센터가 아닌 작고 소박한 따스한 공간이라면 지금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내 빡빡한 머릿속을 살그머니 비집고 들어왔다.

올해 초부터 하나씩 하나씩 '건강한 상담센터'의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십 년이 넘어 낡아버린 약국 바닥장판을 환하게 빛나는 새 장판으로 바꾸었고. 십 오 년이 다 된 스탠드에어컨을 버리고 벽걸이 에어컨을 구입하여 의자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채 열 평이 안 되는 작은 약국이었기에, 책상과 의자 놓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약국내의 가구를 옮기고 또 다시 저리로 옮기고, 땀 흘리는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버겁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여유가 없어 직접 하였기에 하나하나가 더욱 귀하게 다가왔다.

'건강한 상담센터'라는 글자를 새긴 단단한 은행나무 간판을 약국 바깥벽에 달면서 소중한 발걸음 내딛기 시작하였다.

가장 가슴 뛰었던 일은 '건강한 문고'를 만드는 일이었다. 약장 하나를 치워 책장으로 꾸몄고, 집에서 즐겨보던 책 들 중에서 재밌고 감동적인 책들을 골라 책장을 채웠다. 라벨을 붙이고 번호를 매겨 정리 작업을 할 때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을 한참하기도 했다.소설, 에세이, 만화, 이렇게 분류한 책이 이백 여권이 넘었고 책장하나를 가득 채웠다.

'재미있고 신나는 책을 무료로 빌려드립니다'알록달록 예쁜 전단지도 만들어 배포하였고 도서대여공책도 꼼꼼하게 만들었다.

'건강한 문고'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은 책을 보내주신 분들도 있어서 '건강한 문고'는 훨씬 풍요로워 질 수 있었다.

'어, 여기 책이 있네요. 헐 만화책도 있네요. 와우 대박이다.' 만화책을 좋아한다는 그 친구는 상기된 얼굴로 뭐가 재미있냐고 물어본다.'북해의 별'이 가장 재미있고 멋있다고, 꽃미남 주인공과 불타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주인공의 용감함이 부러웠다고 이야기하면 '약사님도 그런 미소년을 좋아하시나봐요. 하하하 왠지 안 어울려요.'

재미있는 만화책, 가벼운 에세이집, 흥미진진한 소설책, 약간 무거운 역사교양도서 등등 건강한 문고의 많은 책들이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을 빌리러온 사람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건강한 약국을 가득 채웠다.

'건강한 문고'와 더불어 '천연비누 만들기'가 '건강한 상담센터'의 양대 기둥이다.천연비누만들기 강사님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저런 도구와 재료들을 구입하고 준비하여 시작하였다. 어렵게 만든 공간에 작은 원목 일인용의자들과 책상을 들여 각종 비누재료들을 정리하였고, 한 명 혹은 두 명씩 비누 만들기 수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화력 조절이나 첨가제 넣을 때 온도 조절 미숙 등으로 밀가루 덩어리 같은 비누를 만들기도 하였다. 몇 번 실수를 거친 뒤 내게도 천연비누 만들기는 힐링의 시간으로 자리 잡았다. 고운 색을 내는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천연의 색이 만들어지고 네모난 혹은 동그란 비누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였다.

지치고 힘든 피부에 도움이 되는 천연비누를 만드는 일도 기쁘지만, 정성스레 만든 귀한 비누를 누군가하고 나누는 일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나눔이 주는 황홀함과 그 짜릿함은 나를 더욱 설레게 하고 가득하게 한다.

'천연비누 만들기'수업을 알리는 홍보물을 약국 창에 붙이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천연비누 만들기’수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토피를 앓고 있는 손녀에게 좋은 비누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할머님은 초록빛이 도는 편백비누를 만드셨고, 성매매업소에서 함께 일하는 언니들과 나누고 싶다는 순희씨는 앵두처럼 맑고 붉은 빛이 강한 소목비누를 열심히 만들었다.

비누만들기를 배우고 싶다는 지역 분들이 많아서 근처의 빈 상가건물을 빌려 수업을 하기도 했다. 첫 수업시간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옥희씨를 만나게 되었다. 옥희씨는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뭘 해보는 게 처음이라면서 흥분하여 모든 순서를 앞서가는 통에 좀 어려움이 있었다. 그녀의 빨라지는 말투와 급한 손동작 그리고 기다리지 않고 빨리 해버린 탓에 울퉁불퉁한 비누를 만들었지만 옥희씨는 너무 이쁘다면서 소리를 질렀다. 옥희씨는 주황빛이 감도는 치자비누를 만들었다.

그 뒤로 그녀는 야간 식당일을 하게 되었고 출근 할 때면 종종 약국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곤 한다. 부부싸움을 한 날이면 쪼르르 달려와 남편 흉을 하염없이 보기도 하는 귀여운 옥희씨,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아들아이 학교에서 보내온 서류종이를 이렇게 저렇게 쓰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녀의 높고 빠른 목소리가 건강한 약국을 가득 채운다.

늘 어두운 눈빛으로 수면유도제만을 사가던 영희씨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제가 볼만한 책이 있을까요. 제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잠도 안 오고 머리가 많이 아프고 그래서.. 수면제를 먹어도 잠은 잘 안 오고... '
'미움 받을 용기'를 그녀에게 골라주었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의 힘든 기억은 지워버리고,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작은 책 한권이 그녀가 편안해지는 길로 가는 방향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서대여공책에 그녀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녀의 마음길이 열려 따스한 물이 오갈 수 있기를, 때로는 서늘한 물이 드나들어 그녀의 시림이 더 하여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마음길이 단단해져서 그녀가 견디어내길...

'건강한 약국'의 약사로서,'건강한 상담센터'의 사회복지사로서,
'북해의 별'을 읽으며 잘생긴 유리핀을 보고 싶다고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싶고,

연초록 쑥 비누가 얼마나 피부를 보송보송하게 만드는 지 두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하고 싶고,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신명나는 일인지 손잡고 이야기하고 싶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따스한 친구로, 더불어 나또한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