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이가탄한국약사문학상 당선작

제4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수필 부문

[ 우수상 ]

모든 날이 좋았다

이현주약사

이현주약사
(대구 달서구)

*드라마 ‘도깨비’ 김신 대사 부분에서

“여기 약 버리는 데가 어디예요?”

쌀쌀맞아 보이는 한 새댁이 볼록한 까만 봉지를 들고 들어서며 물었다.

“아 폐기의약품이에요? 고 앞쪽 상자에 넣어 주세요.”

새댁은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폐기의약품 상자를 찾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상자 뚜껑을 열어 준다. 새댁은 봉지를 털어 포장된 안 먹을 약들을 쏟아 붓는다.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 말을 붙여 보았다. “감기약 같은데 다 나으셨나 봐요?” “네, 괜찮아졌는데 먹을 필요 없잖아요?” 새댁은 여전히 나를 외면한 채 할 일을 마치고는 쌩 돌아 나간다. 익히 보아온 모습이고 나는 피식 웃는다.

아픈 데가 다 좋아졌는데 약 먹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의 약사로서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니 버리는 약이 있다는 건 그걸 다 먹지 않았어도 몸이 회복된 것이니 아주 좋은 일인 것이다. 몸이 좋아지면 약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인생에서 성공하게 되면 실패했거나 괴로웠던 나날들은 역시 버리는 약처럼 잊거나 가끔씩은 화려한 포장지를 씌워 미화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그 새댁은 내게 그렇게 대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약국에 약을 버리러 오면 미안한 듯 굴어댄다. 아팠던 나날이 있어서 건강한 나날이 더욱 소중한 줄을 알게 되지만 다들 건강을 되찾으면 우리 약사는 아픈 시간을 대표하는 직종이라 그런지 버려지는 저 쓰디쓴 약과 같이 홀대(?)당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거의 연인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단다. 그러니 지금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보며 속으로 과거의 그 사람과 비교를 하지말 일이다. 무엇이든 과거를 미화하여 저장하는 두뇌의 속성 탓이란다. 그래서 지나고 보면 그 힘들었던 군대 시절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엄혹했던 군사정부 시절이 도덕적으로 옳았다고 그리워하는 것일 터. 실제로는 뇌가 재생해내는 기억과 감정은 정확하지 못하다고 봐야 한다. 우겨대는 환자들 앞에서 우리 약사들은 곧잘 얼마나 절망하는가. 그러는 나는 또 얼마나 내 기억과 뇌를 추종하는 고집쟁이인가.

손님들 중엔 포교를 과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나 많다. 게다가 그런 믿음의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나는 대략 종교 별로 대책을 세워 두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계 종교를 전도하려 하시는 분들에겐 이렇게 응수한다. “저, 제가 가톨릭대학교 나왔거든요.” 그럼 그 천국의 예약자는 눈이 동그래진다. “제가 성당 다니려고 했으면 그 때, 그러니까 20년 전에 이미 다녔을 겁니다.” 대개는 그 정도에서 나가떨어진다. 못 알아듣는 선교인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하건대, 난 정말 기독교계 종교를 가질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땐 괜찮은 롤모델 교인과 성직자들도 있었다. 난 그러나 지금 무탈한(?) 무종교론자가 되어 있는데, 이유는 단 하나, 천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였다. 지옥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처럼(!) 죄지은 자들이 모여서 고통을 받는다, 라. 이건 정말 말이 된다. 어쩐지 그래야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당을 한번 생각해보자. 늘 행복하고 아무 걱정 없고 싸움도 없고 웃음이 넘쳐 흐르고... 그러니까 그게 가능할까? 아무리 행복한 순간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아니, 행복이란 어떤 찰나적인 느낌이 아닌가? 열심히 조제하고 설명하여 환자분들에게 무사히 약봉지를 쥐여 보내드리고 난 뒤 뒷정리를 하며 느껴지는 한 순간의 여유와 즐거움. 그게 행복이지 어찌 늘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있을까. 그건 우리가 잘 아는 그 마약이나 향정신성의약품 등으로 뇌의 아편양 신경전달물질을 계속 분비케하는 상황이다. 옛 영화에서 가끔씩 보이는, 청나라 말기 아편쟁이들이 떼지어 헐떡대는 움막같은 아편굴을 떠올리면 어떨까. 그 상황의 약물 중독자들은 자신들이 천당에 와있다고 느낄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 어떤 완벽한 천당이나 극락 세계를 떠올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종교가 우리 인간들에게 약속할 수 있는 지고지락은 무엇일까? 있기나 한 것일까.

고통과 행복은 동전 양 면 사이이다. 고통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고통이 끝나는 한순간 느껴지는 행복과 쾌락도 큰 것이다.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러너스하이 (Runner's High)도 그러잖은가. 오랫동안 뛰는 괴로움 뒤에 오는 그 High를 맛보려고 뛰는 것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라고 인사한다. 그럴 순 없다. 매일매일이 좋다면 그 매일매일의 다음 날은 절대 좋을 수 없다. 우리는 지루함의 대마왕이다.

‘영원히 사랑해’ 라고 연인들은 속삭인다. 그럴 순 없다. 고작해야 좀 오랫동안 가끔씩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권태로움의 자식들이다.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바란다. 다른 쪽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국민과 소통하는 지도자가 되라고. 그러나 오천 만 국민 모두가 생각이 있고 바라는 게 다른데 부지하세월에 그 의견을 다 듣고 반영까지 할 수 있을까. 어떤 국민들에게는 필히 불통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불행히도 우리나라 작금의 대통령들은 99% 불통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고통과 행복이 떨어질 수 없는, 야누스의 얼굴같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바로 여기, 우리 사는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고통은 행복을 돋을새김하는 무대거나 배경이 아닐까 말이다. 지구는,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Pale Blue Dot이라고 부른 이 지구는 저 황량하고 일견 무자비해 보이는 검은 우주라는 지옥 위에 진짜 한 점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천국이 아닌가 말이다. 우주는, 우리가 아는 물질로 고작 4%, 어떤 전자기파로도 감지되지 않는 암흑물질로 23%, 나머지 73% 암흑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알고 관측할 수 있는 보통의 물질은 4%에 지나지 않는다. 이 4%의 대부분은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성간 먼지나 기체이다. 지구와 태양 그리고 별과 은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전체 에너지의 0.4%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0.4%에 속하는 우리는, 살아 지성을 갖고 이 글을 쓰고 읽고 쓰는 당신과 나는, 그저 운이 좋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지금 천국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증거를 좀 더 대볼까.

최초로 우주선을 탄 우주비행사였던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은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에 신은 없었다. 주변을 아주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역시 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경쟁심과 신심이 투철했던 미국의 아폴로호 탑승 우주인중 한 명인 제임스 어윈은 달 표면에서 신과의 해후(!)를 경험하고 이렇게 남겼다.

“저 멀리 지구가 오도카니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드문 우주비행사같이 지구 이탈 체험을 한 이는 몇 명 되지 않지만 그들은 무신, 유신적 경향을 떠나서 공히 종교적인 느낌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구의 아름다움을 거의 무아지경 접신의 경지에서 표현한다. 그렇다면 지구가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랴.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요즘(2017년 초) 장안의 화제를 일으킨 드라마 ‘도깨비’ 중 주인공 김신의 대사이다. 도깨비는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아서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줄 신부를 기다린다. 그렇다. 영원히 사는 것은 지옥의 한 형벌이다. 지구상의 우리는 거의 모두 영원불멸을 꿈꾼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영원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TV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원한 사랑에 열광하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고통스럽기에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다. 단 하나 위로가 되는 사실이,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사랑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사랑은 늘 가능하다는 것 정도라면 어떨까.

고통과 행복, 고통과 사랑이 번갈아 우리를 뒤흔드는 여기 지구라는 천국에서 도깨비와 그의 신부는 몇 번이나 환생을 거듭하며 만나고 헤어진다. 꼭 같은 모습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루함의 대마왕인 우리에게 그런 정도는 허용되기를?!).

그러니 이 시가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또 좋아서, 날이 계속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라고 노래했다면 나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 그래서 덧없고 허튼 맹세일 수 있지만 또다시 돌아오는 봄날이 있기에 모든 날은 살아봄 직하다. 그 역시 끝은 있을 것이다. 끝이 있기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도깨비는 영원을 끝장내기 위해, 즉 다시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신부를 찾아 헤맨 것이리라.

사실상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인 낙관주의자들이다, 아직 우울증 환자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실제로 로또를 맞을 확률보다 벼락을 맞을 확률이 더 높지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빗속을 돌아다닌다. 각종 사고, 재난, 재앙 등을 생각하면 실제로 인생이란 아주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일만이 일어나길 바라고 또 그렇다고 믿으며 잘 살고 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실제 우울증 환자들의 대답이 더욱 정확하다. 그러나 자신의 운을 믿으며 살다보면 그 만큼 위험을 무릅쓰게 되므로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염려만 하고 조심조심 살아가는 사람들보단 인생에서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비합리적인 사고가 정신적인 건강에 도움이 되는 예라고 한다.

가장 두려운 일이 될 수 있는 죽음조차 비합리적으로 유쾌하게 여길 수 있는 명언도 있다. 유명한 염세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죽음이 다가오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류에 위안이 되는 통찰을 남겼다. “죽음이란 끝이 아니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격을 갖지 않은 존재로의 이행, 우주적 조화를 향한 재결합이다.” 서양적인 윤회 사상이라고나 할까.

자 정리하자면, 당신과 나는 그 예의 0.4%에 속하는 운수 좋은 존재인데다가 사실은 우울증에 걸려 신음해야 하지만 이렇게 오늘도 울고 웃고 사랑하고 심지어 각종 병을 치료하는 약사까지 되어 있으니 잘만 생각하면 우리는 전생에서 나라를 구한 듯하다.

집으로 가는 도중 줄지어 선 커피점 입간판이 역시 나를 반긴다.

‘늘 달기만 한 것은 없다. 그리고 늘 쓰기만 한 것도 없다’

내가 알기론 그 집 커피만큼 쓰디쓴 것도 없던데 말이다.

어쨌든 커피 한 모금 입에 물고 걸어간다. 커피가 써서, 커피가 달콤해서, 커피가 적당해서 그래서 모든 날이 좋았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어떤 데는 잘 쓰지 못해서, 당신이 내 글을 읽고 있어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천국에서 조우할 수 있어서 모든 날이 더욱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