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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보다는 당익(黨益)을 앞세운 붕당정치

[조선의 역사, 옆에서 보기] 한갑현 대한약사회 사무총장

2014-07-24 06:00:00 약사공론 기자 약사공론 기자 jwkim@kpanews.co.kr


한갑현 대약 사무총장

송자(宋子)-노론, 시열아-남인

붕당정치는 당파간 원한이 근원이었다.

붕당(朋黨)은 학문적·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붕당정치는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 정치 형태로 기능하게 된다.

조선의 역사에서 붕당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학맥으로 이어져온 당파의 이익이 국익(國益)보다 앞서 고변, 상소 등으로 상대방을 유배, 처형하는 등 극단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왜곡한 부정적인 측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조(14대 왕) 이후 재야의 사림(士林) 세력이 중앙 정계로 진출해 개국 공신세력인 훈구파(勳舊派)를 물리치고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후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戚臣)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로 다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하게 된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내고 먼저 중앙정계를 차지한 선배 사림파이며,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뒤늦게 조정에 진출한 후배 사림파이다.

훈구파정치의 잔재 청산에 대해 서인은 비교적 유연한 입장이었던 반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으로 대표되는 경상도 연합이었던 동인은 강직한 학풍으로 인해 빨리 훈구파의 정치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당시의 선비들은 공격적이고 강경한 입장인 동인에 더 열광했으며, 후배 사림파였던 동인의 학풍이 더 뛰어나 실력으로 조정을 휘어잡았다. 이에 율곡 이이(李珥)가 중간에서 두 당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몰린 뒤(동인이 장악한 삼사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스스로 서인임을 자처한뒤 정계를 은퇴) 양당체제는 다시 공고해 지게 된다.

이후 동인은 북인과 남인, 서인은 노론과 서론으로 분파를 했고 사림파의 선후배 사이였던 서인과 동인은 반목을 거듭하며 이후 300여년간 외척정치와 함께 조선 중·후기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당쟁 확산의 계기 - 기축옥사(己丑獄事)

1575년 서인과 동인이 분파된 14년후,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들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이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정철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를 정권 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사건을 확대했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그 아들 옥남(玉男)은 잡혀서 처형됐다. 정여립의 친척들과 이산해(李山海), 정인홍(鄭仁弘) 등 다수의 동인 핵심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많은 동인들이 처형되면서 이들이 원한을 품은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인의 명사였던 이발(潑), 이길(?) 형제는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물론 팔순노모와 어린손자까지 곤장에 맞아죽었다.

처참하게 죽은 이발, 이길 형제로부터 "찢어 발(潑)길(?) ○○○"(출처 : 정재서 종횡고금)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기축옥사는 조선시대에 당쟁(黨爭)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며, 이 사건으로 날카로워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1592년 임진왜란 발생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후 동인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서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고, 이는 이황(李滉) 계열의 남인(南人)과 조식(曺植) 계열의 북인(北人)으로 동인이 분화되는 계기가 됐다.

광해군 때에 북인 정인홍(鄭仁弘)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 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추진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는 모반 사건으로 계속해서 남게 됐다.


영남 사림(士林)의 몰락 - 인조반정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 이귀(李貴)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뒤의 인조) 종(倧)을 왕으로 세운 정변이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정치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들이 무력으로 궁을 점령하고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추대했다. 이 정변으로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명이 유배당했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였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의 처형은 남명조식의 제자로서 그 위상이나 정치적 역할을 볼 때 인조반정은 영남 사림들이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다.

이후 대원군 집권기까지 약 200여년간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사림들은 중앙에 진출할 기회를 거의 상실하게 됐다.

서인세력의 득세 -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으로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표면적인 발단은 영의정까지 지낸 허적(許積)의 불경한 행동에서 비롯됐지만, 경신환국을 파괴적 결과로 이끈 사건은 그 이틀 뒤에 발생했다. 그것은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다. `삼복'은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인데,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그들(특히 복선군)과 결탁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이 접수된 것이다. 남인과 종친이 연루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두 주모자인 복선군과 허견, 복창군은 사사됐고 복평군은 유배됐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인의 핵심적인 두 인물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됐다는 것이다.  얼마 뒤 훈련대장 겸 총융사로 병권을 장악했던 유혁연도 사약을 받았다. 남인은 삼복의 변이 일어난지 석 달도 안 되어 주요 인물이 대부분 제거되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정국은 당연히 급변했다. 주요 관직은 서인으로 교체됐고, 국왕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불러 최상의 예우를 베풀었다. 공교롭게 국혼의 변화도 비슷한 때 일어났다. 1680년(숙종 6) 10월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5월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은 것인데, 그녀 또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남인의 정권 탈환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숙종 15) 숙종이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장희빈)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려는 문제를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결국 송시열의 상소는 노론이 권력에서 쫓겨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반면에 권대운(權大運)이 영의정에, 목내선(睦來善)이 좌의정에, 김덕원(金德遠)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남인계가 대거 등용됐다. 이렇게 서인이 집권 10년 만에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국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에서 서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조처는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출향(黜享 - 문묘에서 축출함)과 송시열의 사사일 것이다. 그들은 서인을 상징하는 과거와 현재의 인물이었다. 특히 송시열을 유배지에서 압송하다가 정읍에서 사사한 것은 숙종의 정치운영 방식과 개인적 심리를 깊이 보여주는 조처로 생각된다.

서인세력의 재집권 -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년에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남인이 물러나고, 다시 서인이 권력을 잡은 사건으로 갑술옥사라고도 한다. 환국이란 조선 후기에 붕당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거에 뒤바뀐 사건들을 가리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의 정치 우위가 확고해졌고, 서인들은 그 내부에서 시국관의 차이를 기반으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진전됐다. 한편, 당시 중인, 상인층이 민씨 복위운동의 자금을 대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 경제의 변동이 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됐음을 뜻한다.

또 붕당의 대립이 궁중 내부와 긴밀히 연관됐다는 점에서 `공론'에 따른 정치가 크게 변질됐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이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시기였다.

전근대의 왕정에서 국왕의 독단에 따른 전면적인 정치적 변화는 그 정체(政體)의 원리상 항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 때의 환국은 본질적으로 정책의 대립보다는 궁중의 정쟁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고, 그 방식이 지나치게 돌발적이었으며, 그 결과 또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었다는 측면에서 부정적 성격이 더 크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서인 강·온파의 대립 - 임인옥사(壬寅獄事)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이 강·온파로 갈라지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됐다.

경종 2년 실권을 장악한 소론세력은 노론을 완전히 실각시키기 위해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 : 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 첫째 자객을 왕궁에 들여보내 왕을 시해하는 방법, 둘째 음식에 독약을 타서 왕을 죽이는 방법, 셋째 왕의 전교를 받아 경종을 폐출시키는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한다.

이 고변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형 당하는데 이들을 `노론 4대신'이라고 부른다.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유배되고 처형된 사건을 임인옥사라 한다.

사형당한 이가 20여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30여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명, 유배된 이가 100여명을 넘었다.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헌정질서에 의해 즉위한 국왕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노론 당론에 있었다.

보다 직접적 계기는 세제(世弟) 대리청정이 무산된 데 있었다. 세제 대리청정이 무산되면서 노론은 반대당파로부터 "남의 신하가 되어 천위(天位)를 몰래 옮길 계책을 품었다", "그 마음의 소재는 길 가는 사람도 안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서인과 남인의 반정 - 이인좌의 난

1728년(영조 4) 서인과 남인의 일부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했던 반정이다.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 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난을 일으켰다.

큰 내란은 충청도와 경상남도에서 일어났다. 영조4년인 1728년 경남 안의현에서 일어난 정희량의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영조의 왕위 계승에 얽힌 당파싸움과 정인홍 뒤에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경상남도 지방의 소외된 사림들의 불평이 겹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동기는 청주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난과 관련이 있다. 이인좌의 난은 충청남북도 일대를 소란하게 하다가 진정됐고 정희량의 난은 서부 경상남도 일대를 소란하게 하다가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 이후 노론정부는 영남지방의 골수남인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회유에 따르지 않으니 반역향으로 취급당했다.

마침내 영조4년 대구감영앞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쉰해 동안에 걸쳐서 이 지방 사람들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니 그때부터 경상우도의 조식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하고 말았다.

왕조정치 역사에서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이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다.

원한 맺힌 당파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

남인중에는 사천목(睦)씨, 나주정(丁)씨, 진주강(姜)씨들이 강경파의 입장에서 노론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노론진영에서 이들을 "목, 정강이를 부러뜨리자"고 다짐했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한다.  모두 치열했던 당시 당쟁의 표현들이다.

노론에서는 우암 송시열을 최대 경어를 사용해 공자와 맹자 처럼 성인의 반열인 송자(宋子)라고 칭했다.

반면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남인들은 집에서 키우던 개이름을 '시열아, 시열아'로 지어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국익보다는 당익을 앞세웠던 조선시대의 당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편가름과 거기서 기인한 갈등은 인간의 숙명에 가깝다. 그러나 부정적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전의 한 원동력은 차이와 논쟁이다. 순수하고 일치된 사회는 폭압적 전체주의와 멀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당쟁은 일단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핵심적 문제는 그런 편가름과 갈등이 어떤 요인으로 발생했고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졌는가 하는 측면일 것이다.

문제는 조선 당쟁의 역사가 한마디로 원한 맺힌 '골육상쟁'의 역사였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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