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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 받은 혜택, 이웃에 나누는 6평 약국의 88세 현역

[창간특집=사람사는 곳, 동네약국] ①수유동 수유북부시장

2019-07-08 12:00:27 김경민 기자 김경민 기자 kkm@kpanews.co.kr

[창간특집=사람사는 곳, 동네약국]

전국 약국 2만여 곳. 약국은 전국에 골고루 퍼져 국민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한 곳에서 2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동네 주민들과 소통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지역사회에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도 한다. 수유동 수유북부시장, 방송의 메카 ‘상암동’, 중국인 거리 구로동, 노량진 학원가까지 각 지역을 대표하는 동네 골목길을 찾아 약사들이 말하는 지역의 특색과 이를 위한 약국의 변화는 무엇이었는지 가감 없는 이야기를 담았다.

①수유동 수유북부시장, 6평 약국서 지킨 60년 세월
②방송의 메카 상암동, ‘1분 1초’가 바쁜 사람들
③구로동 중국인 거리, 중국어 POP통한 복약지도 필수
④노량진 학원가, 청년이 떠난다 ‘아프니까 청춘’ 우울함 투영


“인생을 살면서 무의미하게 죽으면 창피한 것 아닌가. 이름은 남기고 죽어야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뵙지.”

명칭만 시장일 뿐 작은 마트와 방앗간, 철물점 등 몇몇 상가로 구성된 서울 강북구 수유북부시장, 그 앞 모퉁이에는 투박하고 빛바랜 글씨체로 적힌 ‘한양약국’이 눈에 띈다. 

약국 주변은 주택이 밀집돼 있고 인근 500여미터 내에는 병·의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약국이 자리 잡고 있어 약사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권찬혁 약사.

이곳에서 46년, 총 60여년간 약국을 운영 중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권찬혁(88세. 성대약대 1회 졸업생) 약사, 고령의 나이에도 아직 약국을 운영 중인 그를 만나봤다.

권 약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말도 없이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6평 남짓한 약국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약장에는 진통제, 감기약 같은 일반약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이 약국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처방 조제를 위한 컴퓨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컴퓨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약국을 찾아오는 환자를 위한 사탕바구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의약분업 전에는 처방 조제를 했었지. 내가 컴퓨터를 사용 못해서 지금은 상비약이나 드링크제만 팔고 있어”

권 약사는 이곳에서 46년간 약국을 운영해 왔다. 처방 조제를 못 하지만 오래된 약국인 만큼 지역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올해 88세인 그는 편하게 노후를 즐겨도 될 법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며 좋은 일을 위해 약국을 운영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하루에 2만원에서 3만원씩 벌고 있어.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많이 벌고 있는 거 아닌가. 한 달이면 100만원이야. 좋은 일에 쓰려면 적게나마 벌어야지.”

△일제 강점기 출생, 격동기를 견뎌온 파란만장한 생애
그는 일제 강점기에 출생해 창씨 개명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소학교 때에는 태평양전쟁에 휩쓸렸으며, 일본의 패전으로 나라가 독립은 됐으나 뒤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피난지인 부산에서 대학에 입학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4·19혁명, 5·16쿠데타 등 격동기를 끈질기게 견디며 약사의 길을 걸어왔다.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오며 배움을 갈망하던 그는 한국전쟁 중 피난 시절 부산 목조 임시 건물에서 입학식을 거행하고 성균관대 약학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 때 내가 학생장이라 성균관대 총장이었던 독립투사 김창숙 선생을 만나게 됐어. 이분을 보고 졸업하고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자주 찾아가 인생관에 대해 많이 배웠어.” 

△“나는 혜택받은 사람, 기부는 당연한 일”
권 약사는 1957년 대학 졸업 후 충남 부여 고려인삼전매지청 제조계장으로 취직해 10년간 일했다. 당시 약국과 겸업이 가능해 약국도 같이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자녀의 교육 문제로 고민하다가 73년 퇴사해 지금의 ‘한양약국’을 개국했다.

2000년 의약분업 전까지는 약국에서 조제를 할 수 있었고 한방도 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업이 아주 잘 됐다고 한다.


약국 인근은 주택가로 주변 500미터 내에는 병·의원이 없다.

“예전에는 무슨 병이든 약을 먹고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약국 영업이 잘됐어. 그때 돈을 모으고 적금을 들어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됐지.” 

권 약사는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 축적되자 본격적인 장학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삯바늘질로 밤을 지새우며 대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어머니의 택호라도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머니의 택호 ‘서암댁’을 본따 ‘서암장학재단’을 운영하며 장학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덕이고 사회에서 혜택을 많이 받아 재산을 모은 사람인데 그냥 무의미하게 죽으면 창피한 것 아닌가? 그래서 사회에 환원하고 죽어야겠다 싶었어.”

△스스로 지킨 다섯 가지 원칙
83년부터 그가 졸업한 단계초등학교에 3명을 선정해 당시 공무원 초봉에 해당하는 금액인 10만원씩 주고 있으며, 신등 중·고등학교에는 교양 도서 1천여권을 기증하고 해마다 1명에게 100만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또한 2000년에는 성균관대 약대에 찾아가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며 1억원을 기부했다.  

“약대에 장학금을 기부한 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뭔가 더 뜻깊은 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금을 들어놨어. 2000년에 만기가 돼 그 돈을 모두 기부했지”

첫째 돈에 연연하며 약국을 운영하지 않는다. 둘째 최고 효력의 약은 최선의 마음으로 제공하자. 셋째 집안을 화목하고 행복하게 만들자.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다섯째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봉사하자.

권 약사는 초등학생 시절 운동장 철봉대 앞에서 시설 기증자 이름을 보고, 나도 커서 훌륭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에 더해 본인만의 다섯 가지 원칙을 정하며 소신있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행복이야. 즉, 행복하려면 남들과 나눠야 행복한 것이지, 나는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누려고 하는거야. 죽으면 다 무슨 소용있겠어.”

그는 모교 장학사업과 더불어 인근 경로당에 연탄을 넣어주고, 고향 어르신들에게 내복 선물을 하는 등 주위에 많은 것을 베풀어 왔다.

특히 본인이 살던 건물까지 팔아 고향 면사무소 대지를 구매해 면사무소를 짓게 하고 후대를 위해 납골당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세를 살며 여러 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이 앞 건물에 살면서 1층은 약국, 2층은 내가 사는 집이었는데 면사무소 대지를 사고 납골당을 짓기 위해 건물을 팔았어. 그래서 전세를 살면서 이사를 많이 다녔지. 그 후에는 지금의 약국 부지를 사서 다시 들어왔어. 이때는 어느정도 벌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지금 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나도 못했을 거야.”

△행복한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
올해 88세인 권 약사는 대학 시절 폐결핵이 걸리면서 65년도에 왼쪽 폐를 잘라냈다. 기력이 다해 이제 곧 머지않아 하늘로 돌아가면 평생 그리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나 잘살다 왔지요?”라고 말한 후에 한 번도 하지 못한 ‘응석’까지 부려보고 싶다고 전했다.

“우리 동문이 당시 70명이 입학해 43명이 졸업했는데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12명뿐이야. 31명이 먼저 떠났지. 나는 그동안 벌었던 것들은 거의 다 팔아 사회에 기부하고 하고자 하는 뜻을 이뤘으니 이제는 여한이 없어.”

더불어 치열하게 사는 후배 약사들을 안타까워하며 ‘약사’라는 직업에 맞게 어려운 이웃을 잘 보살펴 주길 희망했다.

“지금은 약사사회가 많이 힘들어졌지. 그래도 약사는 상위에 속하는 직업이면서 다른 직업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약사들이 어려운 이웃을 잘 보살펴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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