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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찾으며, 이정표를 만들며

강수연 동국제약 제제기술연구소 상무

2020-09-10 11:24:56 약사공론 기자 약사공론 기자 sgkam@kpanews.co.kr

아프리카의 의료선교봉사, 유난히 환자들이 많았던 그 해에는 마지막날 하루를 샤워실이 있는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먹는 물조차 부족해서 고양이 세수로 일주일을 버텼고,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한마디가 어쩌면 그리도 반갑고 감사하던지… 그렇게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찌그러진 버스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교통체계라는 것도 없어서 현지 선교사님의 차가 앞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아뿔싸, 언제 인지 모르게 우리는 앞선 차량을 놓치게 되었고 무슨 이유인지 앞 차와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믿어도 될런지 알 수 없는 지도에 기대어 버스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지만 어둑어둑 해는 지고, 인가 한 채도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 한복판에서 우리는 조금씩 걱정으로 지쳐 가기 시작했다. 

출발 전 현지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했고,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우리는 운전사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확인해보니 운전사는 목적지가 어딘 지를 들었을 뿐 가는 길은 우리가 안내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결국 목적지는 알지만 목적지로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른 채 우리는 버스를 출발시킨 것이었다.

누군가 한참 전에 지나 온 분기점에서 이정표를 본 것 같다고 기억해냈고, 우리는 계속 앞으로 가 볼 것인지 다시 분기점으로 돌아가 확인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지금까지 덜컹거리며 참고 온 길이 아까우니 그냥 더 가보자는 의견과 그래도 이 시점에서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방향이 맞는지 확인해보자는 의견이 맞섰다. 

결국 차를 돌려 왔던 길을 하염없이 다시 돌아가게 되었고, 분기점에 도착한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정표는 우리가 가던 길이 맞는 방향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출발하기 전에 경로를 확인했더라면, 한 명이라도 이정표가 나왔을 때 눈여겨보았더라면 허허벌판에서 덩그러니 수시간동안 헤매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정표를 확인하느라 차를 돌린 그 지점에서 목적지가 목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종종 중요한 시작을 해야 할 때 그 경험을 떠올린다.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약을 개발하는 일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고, 그렇기에 더욱 방향과 이정표를 확인해가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기술과 매력적인 타깃을 가진 훌륭한 연구들이 종종 이정표를 확인하지 않아서 처음으로 되돌아가거나 가던 길을 포기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특히 업무의 기능별 시스템이 미처 갖춰지지 않고 경험이 부족한 조직일수록 그런 일은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제품개발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도 그렇다. 흔히 연구를 시작할 때 우리는 타겟 시장의 크기가 큰지, 미충족 수요(unmet needs)가 있는지, 경쟁상황이 어떤지를 우선적으로 살핀다. 너무나 당연하고 합당한 출발점이다. 

이 중, 조금의 편차는 있겠지만 시장의 크기는 숫자로 환산이 되고, 미충적 수요는 더 나은 의약품에 대한 니즈가 항상 존재하므로 정보수집과 해석에 큰 이견이 없다.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분은 경쟁상황에서 개발 중인 제품의 상대 위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쉽게 간과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질환이나 환자의 치료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쟁의 범위를 협소하게 규정하여 막상 개발은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한 경쟁품이 중간에 등장하는 경우를 당하기도 한다. 

또한 경쟁품을 파악한다는 것은 경쟁품의 특징을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경쟁품의 개발과정을 안다는 뜻도 포함되어야 한다. 신약개발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벤치마크 할 수 있는 경쟁품의 개발이력과 자료 패키지를 잘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그 과정을 추적하여 살펴보는 경우도 많지 않음을 본다. 

최근 항암제개발에 많은 연구역량이 집중되는데 암은 새로운 약물의 출현과 evidence에 따라 치료방법이 빠르게 변화하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기본적으로 환자의 암종, 진행정도와 환자 개인의 특성에 따라 치료방법이 다르고, 1차 치료, 2차 치료, 3차 이후 치료 등 계통을 따라 치료법이 다른 데다, 수술 전 수술 후 치료방법도 다르다. 그렇게 다양한 경우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권고되는 각각의 표준요법이 있고 통상 항암제 개발이란 표준요법 대비 우위를 입증해야 하므로, 어떤 환자냐에 따라 경쟁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게다가 새로이 유용한 치료방법이 입증되면 표준요법도 변화하기 때문에 항암제를 개발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타겟을 잡기위한 엄청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항암제 신약개발을 위해서는 경쟁상황을 잘 정의하고, 기존 항암제 혹은 현재 개발 중인 다른 경쟁품들을 촘촘하게 분석한 뒤 우리가 개발하는 제품이 환자에게 어떤 유익과 가치를 더 제공할 수 있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점이 제품을 개발하는 내내 유지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그런 점에서 항암제 레이저티닙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알다시피 레이저티닙은 상피세포성장인자(EGFR)에 돌연변이가 있는 비소세포폐암의 표적치료제로 개발 중인데 다른 치료제와는 달리 폐암환자 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그러나 방사선 치료 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부족했던 뇌전이 환자에서도 높은 치료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이제까지 개발된EGFR 저해기전을 가진 약물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이는 개발과정에서 폐암이 점차 진행되면서 뇌전이가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뇌전이암을 치료할 수 있는 표적항암제가 필요하다는 폐암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세대 EGFR타겟 약물로 출발은 경쟁사보다 오히려 늦었지만 앞서가는 약물의 부족한 점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혈액뇌관문(Blood Brain Barrier)을 통과하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기존 약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제품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기술과 제품에 자신이 있을수록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데 더 게으른 경우를 많이 본다. 이정표가 충분한데도 이정표를 충분히 무시하는 경우다. 

조사하고 확인하고, 묻고 확인하고, 찾아보고 확인하고, 어쩌면 신약개발의 과정은 이정표를 찾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얕은 물일수록 깊게 건너라고 했던가, 기술과 제품이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될 때야 말로 중요한 이정표를 지나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약물의 효과는 절대값이지만 약물을 선택하는 시장의 기준은 상대값이기 때문이다. 제품을 잘 만들었는데 시장에서 원하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정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너무 많은 것이 흠이다. 논문이나 학회, 웹사이트나 보고서, 컨설턴트 등 도처에 정보가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필자의 경우는 실제 의약품을 사용하고 환자를 치료하시는 의료진들에게서 가장 큰 도움을 받는 것 같다. 그 분들은 질문이 많으시지만, 대신 매우 현명한 대답도 동시에 제시해 주신다. 

또 최근에는 신약개발의 경험이 쌓이면서 국내에도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반갑다. 공유의 장을 많이 만들고 참여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은 서로를 나아가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어쩌면 멀리서 찾지 않더라도 오늘 회의실을 나서는 팀원의 혼잣말이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 이정표도 움직이고, 이정표도 거짓말을 할 때가 있지만 관심과 겸손함,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제대로 된 이정표가 우리를 모르고 지나치지는 않는다.   

이정표는 모두 함께 살피고 모두 함께 확인해야 한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 버스에 타고 있다. 신약개발을 향한 먼 길, 정처없이 헤매거나 되돌아오는 일 없이 지혜롭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도 서로에게 멋진 이정표가 되어주면 좋겠다. 함께 세워나갈 이정표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지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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