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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학상

제7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동네총각의 17만원

박현옥

연일 덥다. 무덥다가도 시원한 장대비가 한바탕 달아오른 대지를 식혀주고 나면 숨 돌릴 여유가 생겨 다시 더위를 견딜 만하던 그런 여름이 아니다. 근래에는 폭우 아니면 폭염이라더니 정말 숨 막히는 폭염이 이어진다. 마치, 알싸하니 매우면서도 감칠맛있던 우리 고유의 매운맛이 아니라 캡사이신 분말처럼 인정사정없는 날씨다. 이런 더위는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어쩔 수 없으니 맞서서 이겨내는 수밖에. 무더운 날에는 다들 "하이고 시원 허다. 여기 오니 좀 살것네." 라며 약국에 들어선다. 이럴 때는 나 혼자만 시원한 곳에서 일하는 게 맘 편치만은 않은 구석이 있다. 빤히 보이는 약국 앞 시장의 이웃들 때문이다. 바로 앞 도로에 과일 노점상 아저씨가 파라솔 그늘 하나에 기대어 하루 종일 앉아있고 그 옆에는 끓는 기름 솥 앞에서 튀김을 튀기고 김이 오르는 솥 위에 순대를 얹은 채로 하루를 나는 포장마차 아줌마와 구두 수선공 아저씨, 그리고 좌판을 벌인 상인들이 있어서다. 물론 우리 집 냉온수기나 커피 머신은 동네 것이 된지 오래라서 수시로 물병을 가지고 와서 시원한 물을 담아 가고 차를 뽑아가지만 그 찬물 한 병으로 뜨거운 시장 바닥의 열기를 견디는 그들을 보면 맘이 쓰인다. 한데 요 며칠째 포장마차 아줌마가 안 보인다. "여기 홍삼 드링크 한 박스 주세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동네 총각이 아침부터 들어와 하는 말이다. 늘 약국 앞의 노점에서 과일도 팔아주고 포장마차를 잠시 지켜주기도 하며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어정거리는 총각이다. 말이 총각이지 나이는 40 정도 된 남자다. 직업도 아내도 없고 술 버릇이 나쁘고, 별이 하나 있다고 들었지만 싹싹하고 심부름을 잘해서 점심은 앞 노점 이웃들에게 얻어먹을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전에 근무했던 직원과는 견원지간이었다. 전 직원의 말에 따르면 출근 때마다 자신을 훑어보는 눈길이 끈적해서 기분 나쁘다고 했다. "저 녀석 때문에라도 약국 문단속을 잘 해야 해요. 늘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면서 뭔가 틈새를 노리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 역시 30후반의 민감한 아가씨였다. 아마도 앞집 포장마차 아주머니로부터 넌지시 "술만 안 먹으면 아무 문제 없는 청년인데 술 속이 좀 나빠요. 큰집도 한 번 다녀왔고요. 절대 뭘 그냥 줘 버릇 하면 안 돼요." 라는 말을 들어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 근처의 그 총각 옆집에 산다는 할머니가 약 타러 오셔서는 "저 녀석 조심하슈, 저 녀석은 나만 없으면 우리 집을 달달 뒤져서 돈이고 반지고 죄다 가져가." 등등의 이야기를 해서 더 그럴 것이다. 한데 내가 보기에 이 할머니 역시 치매기가 있는 분이라 나는 그냥 흘려듣고 만다. 여하튼 그 총각은 내가 출근할 때 늘 먼저 와서 약국 앞에서 뒨전 거리다가 깍듯이 인사를 하는데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도 한결같다. 추위나 더위를 안 타는 사람 같다. 앞 과일 노점 아저씨의 오른팔이다. 그 총각이 없으면 자리 비우고 화장실을 가지도 못할 것이고 무거운 과일을 차에서 내리고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소분해서 담아 길가에 늘어놓고 하는 일들도 더 어려울 것이다. 내가 보니 그 총각은 제법 부지런하고 시키지 않아도 눈치껏 제 밥값은 하는 것 같았다. 어떨 때 보면 영리하고 눈치가 비상한 것 같다가도 어떨 때 보면 2% 부족한 것도 같다. 그 역시나 우리 약국 냉온수기와 커피 자판기 단골 고객이다. 그런 그가 오늘 아침 큰 소리로 선물용 드링크를 산 것이다. 지폐 만 원짜리를 척하니 꺼내서 지불하며 설명한다. "여기 튀김집 이모 아파서 입원했잖아요. 문병 가려고요." 하더니 이어서 "이모! 나 어제 돈 벌었어요. 17만 원이나.“ (나도 모르는 사이 조카가 하나 늘었다.) "아유~, 잘했네." "제가요, 어제 산일을 했거든요. 포클레인으로 묏자리 파는 걸 거드는데 자꾸 물이 나와요. 그래서 바가지로 퍼내고 어쩌고 일이 좀 많았어요. 하도 덥고 힘들어서 물을 먹으려 좀 쉴 때 그 아주머니가 내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거예요. 뭔가 해서 봤더니 아 글쎄 오만 원짜리를 찔러 주시는 거예요. 하하. 그래서 거기서 오만 원 또 여기 인력 소개소에서 12만 원 이렇게 해서 17만 원이나 벌었다니까요. 원래는 10만 원 받기로 했었는데 말이에요. 하하 " 얼굴이 환하고 목소리 톤이 여느 때보다도 높다. 아까는 이 근방의 아저씨들을 모시고 와서는 드링크를 세병 샀다. 그동안 신세 진 분들 대접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다시 그 17만 원 스토리를 신명 나게 늘어놓았다. "제가 어제 17만 원을 벌었걸랑요......... "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 드링크랑 자판기 커피를 빼서 여기저기 나눈다. 좀 전에는 티셔츠를 새것으로 입고 왔다. 우리 직원에게 자랑하는 모양이다. "저요 이 티셔츠 샀어요. 어뗘요? 괜찮아요?" "응. 보기 좋아요." 그의 17만 원 때문에 나까지 부자가 된 느낌이다. 그의 돈은 뭔가 싱싱하고 펄펄 살아있는 돈 같다. 이 더운 날 열심히 땀 흘려 일당을 받고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17만 원은 내 통장에 들어와서 어느 틈에 이리저리 자동으로 결제되어 사라지고 내역서만 날아드는 그런 의미의 금전과는 달리 느껴졌다. 가끔 늙수그레한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그놈의 자동이체로 월급이 들어오고 난 후부터 가장으로의 자리가 사라졌다니까. 열심히 일하고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서 집사람에게 척하니 내밀 때의 그 기분으로 일을 했는데 말이야. 그때가 좋았지. 아내에게 대접도 받고, 뿌듯한 보람도 있고. 이제는 완전히 머슴이여. 아내 눈치 보고 쥐꼬리만 한 용돈에 목메는." 그 총각의 17만원 가치를 바라보니 나도 카드 대신 빳빳한 지폐를 지갑에 두툼하니 넣었다가 꺼내가며 써볼까도 싶다. 내 노동력의 대가는 지금 어디서 그런 싱싱한 활력을 뿜어내는 것인지. 이 부지런한 동네 총각에게 앞으로도 어제처럼 마땅한 일자리가 종종 생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후덕한 사람 만나서 좋은 인심도 맛보고 또, 이렇게 신세 진 사람들에게 신세도 갚고, 사람 노릇도 떳떳하니 하면서 신나게 지내기를. 오늘 새로 산 선홍색의 티셔츠를 입고 온종일 입이 귀에 걸려있는 그를 보며 내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