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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학상

제7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따죽음의 죽음을 꿈꾸는 삶

정성욱

약제실로 급히 약을 받으러 온 김간호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7병동에 계신 규원 어르신이 어제 세상을 버리셨다는 둥, 2병동 현자 할머니와 3병동 철규 어르신이 세상에나 눈이 맞아 서로 사랑을 시작한다는 등등의 아침 소식을 브리핑? 해준다. 난 처방전에 오류가 있는지 검토하고 그 업무내용을 조제기계로 전송한다. 검수를 마치면 무의미한 침묵의 시간을 새로운 소식으로 채워준 그녀에게 엷은 미소로 화답하며 약을 건넨다. 노인병원의 일상도 여느 일터와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19란 질긴 놈이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면......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의 공습은 그렇지 않아도 삶의 여정에 지친 어르신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40여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매스컴의 단골 먹거리가 되었다. 확진 판정을 받은 어르신과 동료들은 코로나19 치료 거점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남은 직원들은 환자가 발생할 때마다 밀접 접촉자로 분류되어 콧구멍과 목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진단 시료채취 막대를 기꺼이 허락하며 확진된 동료들이 하던 일까지 묵묵히 했다.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지구는 이 몹쓸 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자연계의 법칙이라면 코로나19 사태로 인간이 잃고 얻은 것이 무엇일까? 가장 진화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던 인간의 교만함은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미생물에 의해서 철저히 부서졌다.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고 우주를 비행하던 과학의 힘은 무기력함을 애써 감춘 채 온갖 변명을 쏟아낸다.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약속하던 정치인들의 입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고안된 경제 체제 위주의 사회는 앞을 볼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다. 자연을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로 개조하려 했던 인류는 청사진을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 인간의 오만을 비웃기나 하듯이 지구촌은 도리어 화석 연료의 소모량이 급감하면서 대기가 회복되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과 증기선, 보트운행으로 인해 오염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운하가 다시 맑아진단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크게는 이 우주, 작게는 내 주변의 존재들을 무시한 인간 위주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게 된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바이블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는 한 사람 한사람이 고귀하고 소중한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더 보편적인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음에 있던 억측들을 내려놓고 지금의 세계를 관찰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두려운 경고와 함께 다시 기회도 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쁘게 출발하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에 깜짝 놀라 마음은 요양병원으로 복귀한다. 현실과 상념이 왕래하는 사이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병원 식당은 칼로리와 염도가 계산되어 조리되기에 맛이 늘 그저 그렇지만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먹을 만하다. 점심을 마치고 커피믹스 한잔으로 날 격려하며 오후 환자 차트를 살핀다. 복자할머니는 혈압약이 배로 증량 되었고 명길어르신은 강심제와 이뇨제가 추가 되었다. 수건님은 전립선비대증과 방광염이 심해져 뇨도에 관 삽입을 한단다. 다행히 늘 소란을 피우시던 종덕 어르신은 아티반주사 처방 횟수가 줄어든 것을 보니 좀 진정이 되시나 보다. 의술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이루어 삶을 지켜내시는 어르신들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존경스럽다. 어제까지 조제해 드렸던 병실 어르신의 처방전이 취소되고 남은 약들이 취소처방전과 함께 약제실로 들어온다. 남아 있는 약이 전부 돌아올 때는 거의 이 환자분은 귀천하신 경우이고 일부만 돌아오는 경우에는 퇴원이거나 병원을 옮기는 케이스가 많아 좀 있으면 퇴원 처방전이 올라온다. 그래서 주인을 잃고 약제실로 돌아오는 약을 처리할 때는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다. 몸을 버리셨거나 치료가 되어 떠나신 분의 침상은 다음 떠나실 분의 차지가 되고 새로운 이름의 환자 번호가 입원환자 조회목록에서 등장한다. 약제실에서 업무를 보는 내 입장은 늘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지만 어르신들은 요양병원에 당신의 몸을 의탁하는 것이 생소한 경험일 것이다. 한분 한분이 아마 한 때는 모두 생활력 강한 전사였고 자식들의 믿음직한 언덕이었으리라. 개중에는 사회의 찬사를 받은 분도 있을 것이고 지탄을 받는 인생을 사신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이 온 몸에 세월의 흔적이 파편처럼 박힌 노쇠한 형상으로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깝게 계신다. 문득 의학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의사는 죽음 뒤는 모르지만 환자를 어떻게든 삶 안에 남겨두길 계획한다. 가까운 지인은 뇌에 종양이 있고 제거하면 된다는 의사의 낙관을 믿고 수술대에 누웠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 길로 요양병원에 누워 지내고 있다. 담당의는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인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 사실을 의학의 공로라고 치하할 수 있을까? 의학이 단지 생존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존엄성까지 관심과 책임감을 갖는 것은 최근의 일이며 아직은 연구가 완성적이지 않다. 입원하신 분 중 어떤 이가 귀천하시는 날 하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맑거나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한다. 어느 날이 더 좋다는 것은 없다. 단지 신의 선택일 뿐. 그래서 그저 평범한 하루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몸을 버리는 특별한 날 나는 신의 배려와 사랑을 본다. 그 분들의 죽음은 차별이 없다. 죄를 지었거나 복을 지었거나 절대자 앞에서는 사랑으로 거두어 주시는 가련한 존재일 뿐인 까닭이다. 역사에 남은 위대한 영웅이나 천문학적인 부를 이룬 사람, 노벨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난 연구 성과를 이루어 인류에 이바지한 사람,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는 방에서 스스로가 유일하게 임종을 지켜보는 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온 이, 모든 이에게 한 치의 우열도 없이 꼭 같이 주어지는 것이 죽음이란 사태이다. 신은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삶에 대한 비난과 찬사를 원점으로 돌려주기 위해 죽음을 사용한다. 신의 섭리란 죽음을 통해 죽음의 죽음을 선물하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고귀한 생명을 제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희망과 노력을 무기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할 것이다. 죽음을 망각한 생활은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느끼는 삶은 신의 상태에 가깝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른다. 삶은 그 자체로 기회이며 죽음조차도 신의 배려임을 가슴으로 전율하며 나는 내일 다시 출근하기 위해 약제실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