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타인의 고통
조경빈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으로 추측컨대 타인의 고통을 경시하지 마라, 내지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라는 정도의 교훈이 있는 책일 거라고 예상했었으나 그 예상과는 달랐다. 타인의 고통에 자신만의생각에 빠져 감정 이입을 하는 것도, 섣불리 어떨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결코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없는 존재다. 내가 겪고 있는 이고통을 타인도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이 너무 슬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은 자신의 경험치만큼 세상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경험과 상상의 조합으로 이런 상황엔 이런 감정이 들 것이고 저런 상황엔 저런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 경고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범할 수 있는 무심한 생각조차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날엔 애써 갖춰 놓았던 의도적인 친절 따위는 훌훌 벗어던져 놓은옷처럼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도망가 있고 사소한 일에도 방어 자세를 갖추게 된다. 약국 업무이나 병원 업무이라는 것이 늘 의도치 않게 일이 생기고 계획한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하므로 특히 그런 날에는 어느 정도 긴장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너무나 슬프게도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에 무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앉아 있는 사무실 자리 뒤 천장 스피커를 타고 병원방송으로 하루에 몇 차례씩 울려 퍼지는 코드블루 알림에도 나는 미동도 없이 타자를 치고 있고, 점심시간에는 응급 중환자실이 있는 2층 앞을 지나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울부짖는 환자 가족들 틈을 꼬르륵대는 배를 달래며 무감하게 지나가곤 하는 것이다.
그 날도 어느 반복되는 일상의 하루였을 뿐이지만 조금 더 바쁜 날이었다. 오전에 빼곡히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에게 약을 드리고 잡무도 처리하고 늘 지나가던 응급 중환자실을 통과해 병원식당에 가서 부리나케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소중한 한시간의 점심시간이 지나기 전에 한 숨을 돌리려던 계획을 막 완수할 참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한 숨을 돌리는 것만 남았는데 점심시간에도 투약구는 늘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나의 마지막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있는데 환자 한 분이 찾아오셨기에 평소에는 예닐곱 번 헹구던 입을 후다닥 두 번만 더 헹구고 복약 설명을 해 드리고 나서 그 분이 가시면 점심시간이 채 끝나기 직전 카운트다운 내에라도 휴게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런데 설명을 드리고약을 투약구 앞에 내놓았는데도 그 분은 투약구를 떠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속도로 약을 봉지에서 꺼내더니 남자분인데도 불구하고 약병 뚜껑을 우아해 보이고 신중한 손길로 돌려서 열었다. 나의 점심시간과 환자분의 투약 시간의 속도는 그 유속이 다른 것이 분명했고 그 때문에 초조한 신경이 발동하였다. 약을 드시려는 것 같아서 종이컵이 필요하신지 묻고 챙기러 간 찰나의 순간 환자분은 급기야 내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약이 배송되어 올 때 상자 테이프를 개봉하는데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투약구 안쪽에 놓아 둔 가위를 쓱 집어 드는 것이었다. '아니, 사용해도될지 한 번은 물어보고 쓰셔야 되지 않나, 이런 코로나로 민감한 시기에?' 이러한
예민한 생각이 울컥 솟구쳐 올라오는 순간 가위를 집어 약병 위 밀봉된 속껍질에 내리 꽂는 그 분의 손톱을 보았다. 손톱이 매우 이상했다. 여태껏 보지 못한 모습의 손톱이었다. 문득 기억이 났다. 아아, 이 약의 손톱에 관련된 이상약물반응에 관해 임상시험 의뢰 제약회사에서 공지 메일을 얼마 전에 보냈었지. 메일에서 분명히 봤었지만 그 이상하고 기괴한 손톱 모양을 보기 전까지 나는 글자 그대로만을 봤다.
손톱에 변형이 생기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음. 그 분의 손톱을 여기서 묘사한다고 한들 그것은 모두가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하는 장님의 코끼리 묘사와 같은 것일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금방이라도 살점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덜렁거리며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두껍게 각화된 손톱에는 일부 여기저기에 구멍도 뚫려 있고 무엇보다도 길게 자라나 한마디로 섬뜩한 모습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 배경인 즉슨 환자분이 투약하고 있는 임상시험약은 항암 치료용 신규 개발 중인 약으로 기존 단계의 임상시험에서 수집된 자료에서도 손톱에 관련된 이상사례가 보고된 바 있고 그 분의 경우 그 항암제의 용량을 유지한 결과 암의 사이즈가 조금 줄어든 긍정적 신호를 얻은 대신 손톱을 잃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기존 1, 2세대 항암제의 부작용이란 것은 예측이 되고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전문가로서가 아니어도 익히 들어왔지만 사실 현재 신규로 진행하는 임상시험 중인 약의 경우 최근에는 부작용이 많이 줄어든 표적 또는 면역관문 관련 기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예상치도 못하게 본 손톱에 머리가 멍해졌다. 열손가락의 손톱을 버릴 만큼 절박한 암환자의 고통. 손톱을 보기 전까지 휴게 시간이니 가위 따위에 연연하던 마음까지도 하찮고 초라해지던 순간이었다. 나중에 새로운 항암 주기에 다시 오셨을 때 한 손에는 장갑을 끼고 손 톱마다마다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오신 그 분에게 나도 한 단계 앞서 약병을 열어 비닐 덮개까지 완벽히 제거해 드렸다. 그 분은 고맙다며 손톱이 빠지려고 하는데
아직 붙어있어서 뭔가에 닿을 때마다 너무 아프다고 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었을까? 얼른 쾌차하세요, 그래도 항암 효과를 보시려면 좀만 더 힘내세요, 너무 아프시겠네요. 이런 말들 중 어느 것도 섣불리 꺼내기가 힘들어 묵묵히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저 또 한 번 무감한 사람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인 나는 세상의 끔찍한 사고와 질병과 부작용을 직접 본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약사로서 우리는 비교적 타인의 고통을 많이 보는 직종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신종 플루가 유행하던 겨울, 흡사 좀비 같은 모습으로 약국에 들어와 제일 강한 해열진통제를 찾던 여성분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병원에 가 보시는 것이 좋겠다던 나는 얼른 약이나 주라며 연신 손 매너도 없이 기침을 해대던 그 분과 일주일 후 정확히 똑같은 증상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고 다니던 약국도 서둘러 그만두고 고통스러운 고열로 좀비가 되기 직전에 수액과 타미플루로 호전되었다. 타인의 고통이 바이러스를 타고 전파해 와서 직접 겪어본 나의고통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조심하지 않았던 그 여성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온통 붉게 상기되고 충혈된 모습을 보고서도 타인으로서 무감했던 타자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경험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가 되어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 타미플루가 다 떨어졌으니 알아서 재고가 있는 병원이나 약국을 수소문해 보라며 문전박대 당했던 슬픈 기억이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니 말이다. 너도 당해보라며 침을 뱉는 것이 보복이 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더욱 몸을 움츠리며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라는 생
각이 든다.
타인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오산이고 착각이다. 환자가 되었을 때 ‘저 약사가 내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때로는 인간의 이기적인 심리 중 하나인 '나에게는 저런일이 안 생겨서 다행' 이라는 마음마저도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에서 추측할 수 있는 흔한 기제일 수 있다. 그런 삐딱한 시선과 마음까지도 인정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해 나가는 것이, 결코 알 수는 없지만 공감해 줄 수 있는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최선의 자세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소통의 부재가 우려되는 시기인 만큼 조금 더 배려가 필요하고 신중해야 할때이니 말이다. 손톱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달래며 천천히 약병을 돌리던 환자의 시간만큼의 정도가 타인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고 신중하고 더딘 몸짓에는 나름의 사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몰래 나의 멀쩡하고 매끈한 손톱을 바라보며 안도한 것도 사실이고 그런 비교를 하는 것마저 저질스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마냥 자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정과 무심함 사이에서 늘 헤매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재정비할 마음의 기회를 가져보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해보고 싶다. 나에게는 사소한 누군가의 손톱이
이처럼 단 하나가 아닌 수많은 타인의 고통으로 다가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