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청년문학상 부문
[청년문학상] 수필
우리 집 피아노, 아버지, 그리고 쇼팽
김상휘
가끔 살면서 경험했던 어떤 곳이나 장소, 아니면 사람에 대한 순간적인 기억이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쇼팽 야상곡 2번의 느릿한 왈츠풍 박자를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은, 어느 나른한 일요일 오후의 피아노 방에서 연주에 몰두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피아노 방'은 내가 서대문구의 초등학교에 다녔던 시절 살던 집에 옷장 겸, 창고 겸, 각종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다락방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베란다로 난 창문은 희뿌연 코팅이 되어 어두컴컴했고, 언제나 반쯤만 빛줄기가 들어와서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곳이었다. 곰팡내 나는 그곳의 가장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우리 아버지가 결혼할 때 가져온 피아노였다. 피아노 주위로는 옷들이 겹겹이 걸려 있었는데, 옷이 피아노를 빙 두르고 있어서 피아노에 앉으면 옷의 숲에 아늑하게 파묻힌 기분이었다. 그때는 내가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시기였고, 학원에서 곡을 하나 배워오면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와 그 방에서 혼자서, 또는 아버지랑 같이 열심히 연습하곤 했다.
학원에 다닌 나와는 달리,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우리 아버지는 한두 가지 곡만 우직하게 몇십 번씩 연습하는 스타일이셨다. 그 대상은 바로 쇼팽의 야상곡 2번, 그리고 왈츠 7번이다. 하도 많이 봐서 너덜너덜해지고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쇼팽 3, 왈츠·마주르카> 악보집을 들고, 일요일만 되면 아버지는 피아노 방에 가서 누렇게 변색한 악보를 넘기면서 그 두 곡을 번갈아 연습하셨다. 얼마나 많이 치셨나면, ]거실에 같은 선율만 5번씩 들려올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하고 10년 동안 저 두 곡만 들어서 노이로제에 걸리겠다고 핀잔을 주실 정도였다. 하지만 어린 나는 어려운 곡을 척척 연주하는 아버지가 마냥 멋져 보였고, 근처에서 방방 뛰어다니며 나도 저런 곡들을 연주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조르곤 했다.
하지만 나와 내 동생이 고등학생,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우리들의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아버지께서 피아노 앞에 앉으시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학업 때문에, 동아리 활동 때문에 나도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사를 거듭하면서 예전의 피아노는 이웃집의 소음 민원에 의해 외할머니댁 건넌방으로 옮겨져 쌀 포대기와 김치 냉장고와 함께 놓이게 되는 신세가 되었고, 예전의 행복했던 기억들과 같이 내 관심 속에서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명절 때, 정말 오래간만에 할머니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문득 옛날 그 피아노가 잘 있을지 궁금해서 건넌방에 살그머니 들어가 보았다. 다시 앉은 피아노 의자 앞에서 나는 예전 집의 그 먼지 날리던 피아노 방에서 아버지의 피아노 소리를 듣던 작은 꼬마였다. 피아노는 정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뚜껑에 앉은 두꺼운 먼지가 기억 속에서 잊힌 시간을 나타내 주었다. 먼지를 후후 불고 연 다음, 지금은 혼자서도 잘 칠 수 있게 된 야상곡 2번의 첫 소절을 조용히 쳐 보았다. 치고 난 뒤 눈물을 삼켜야 했던 이유는 건반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서글픔인지, 여러 기억에 무관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인지, 아니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시절이 그리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