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청년문학상 부문
[청년문학상] 수필
그가 남기고 간 것들
정재원
나의 22살 생일을 1주일 남긴 2월의 마지막 밤, 가장 소중한 친구가 죽었다.
나에게 큰 선물이었던 그는 떠나면서도 어김없이 선물을 주고 갔다.
만돌이는 고등학교 때 같이 사물패를 하던 친구였다. 우리 기수 6명은 교내에서 알아줄 만큼 똘똘 뭉쳐 다녔고, 졸업 후 전국 각지로 흩어졌음에도 최소 6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났다. 갓 21살이 된 1월, 롯데월드에서 모인 우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당시 컴퓨터공학과에 재학중이던 그 친구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다.
“나 이제 컴공 그만 둘까 싶어. 안 그래도 잘 못하는 코딩, 맨날 에러 떠서 암 걸릴 것 같아. 게다가 하루 종일 코딩만 해서 그런지 눈도 잘 안보이고 머리가 너무 아파.”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야, 그냥 코딩 못해서 싫다고 해. 찌질하게 건강 핑계 대네.” 하고 웃어 넘겼던 나는 그 다음날 새벽, 눈이 안보이고 계속 구토를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그가 배아세포종 판정을 받았다는 페이스북 글을 올렸을 때 롯데월드에서의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배아세포종. 주로 어린이에게 나타나는 뇌종양이지만 드물게 20살 전후의 성인 남성에게 나타나는 뇌종양이다. 어린이는 적절한 조기 치료가 진행되면 예후가 나쁘지 않지만, 성인 남성은 생존률이 낮은 편이다. 게다가 그 친구는 대뇌 중앙에 위치한 종양이라 당장 수술을 하기엔 위험했고, 치료를 받더라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씩씩한 그는 마침 코딩하기 싫었는데 휴학하고 방사선 치료 받으면서 1년 쉬어가는 시간을 갖게 되어 잘됐다고 웃어 넘겼다. 그리고 대학교 동기들에게 “너네도 암 걸리기 싫으면 컴공을 떠나!” 라고 유쾌하게 말하곤 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 이후 고통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는 본인의 일기를 매일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참 후에야 그의 누나에게 매일 토하고 잠 못 이루던 그의 투병기를 들었을 만큼 주변인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6개월의 치료를 묵묵히 견뎌냈고, 이겨냈다. 8월의 뜨거운 여름날, 완치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가짜 완치’고 5년간 꾸준한 검사를 통해 종양수치가 현재처럼 유지되면 ‘진짜 완치’라고 덤덤히 전하던 그는 복학해서 할 일들에 들떠있었다. 우리 동아리원들도 단풍 구경을 위해 여행 계획을 세우며 설렘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날이 추워지던 11월, 그는 재발 판정을 받았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조금씩 증가하던 종양수치가 치료 후 떠다니던 세포덩어리일 수 있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하던 내 친구는, 역시나 재발이었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아주 진지하게, 나에게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전화로 할까, 카톡으로 할까? 하고 물어봤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 치료 안 받을 거야. 감마나이프를 하면 살 수도 있다는데, 사실상 성공률도 20%도 안 된대. 가족들한테도 짐이 되긴 싫고, 무엇보다 치료를 받더라도 부작용을 달고 사는 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얼마인진 몰라도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시간 보내는 게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난 짧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행복하지 않게 오래 살고 싶진 않아. 너한테 늘 말했듯이 난 어차피 60살까지만 살고 싶었어.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도 빨리 시간 비워놔. 너 나랑 놀러가야 되고 맛있는 것도 먹어야 돼. 우리 다 같이 여행도 가기로 했잖아. 그거 다 하려면 한시가 바빠!”
머리가 띵하다 못해 토할 것 같았던 나와 달리 덤덤한 그의 메시지에,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겨우 답장을 했다.
“야, 난 뭘 하든 항상 너 편이었어.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항상 믿었다고. 이번에도 그건 안 변해. 나뿐만 아니라 널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거 절대 잊지 마.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너한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너 진짜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꼭 네 선택 후회 안 할 만큼 행복해야 돼. 전하기 힘든 말일텐데 나한테 따로 연락 줘서 고마워.”
이후의 시간들은 평화로웠다. 아니, 나는 행복한 시간으로 채우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수척해지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힘들어하던 그 친구와 우리 동아리원들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모른 채 마지막으로 모인 곳은 바람이 아주 매서웠던 1월, 창동역의 한 카페였다. 카페의 온화한 노란 조명 아래에서 6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5시간이 넘게 웃고 떠들었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카페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귀가하기 전, 미리 챙겨온 폴라로이드 프린터로 갓 찍은 사진 6장을 인화했다. 그리곤 각자 한 장씩 지갑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뇌 부근의 종양을 떼어내면 청력을 잃을 순 있지만 어느 정도 생활 유지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수술을 해보기로 결정했다는 연락을 전해왔다. 수술 후 다시 만나자는 짧은 말과 함께 며칠 후, “ㅅㅜ술 ㅈㅏㄹ 그ㅌㄴㅐㅁ” 이라며 어김없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만돌이를 대신해서 그의 누나가 만돌이는 호스피스에서 잠을 자주 자고 있다고 연락해왔다. 이후 받은 연락은, 그의 부고 문자였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생전 인터뷰를 읽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만돌이는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그를 본인 스스로보다도 더 좋아했던 주변 사람들이 걱정된다며,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일 정도에만 ‘아, 그런 이상한 애 하나 있었지.’ 하는 정도로만 기억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내 상태를 귀신같이 예언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 생일은 매년 아직 겨울의 흔적을 떨쳐내지 못한 생명들이 봄을 향해 찌뿌둥한 몸을 깨우던, 겨우내 묵혔던 일들을 청산하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모두에게 주어진 새로운 한 해를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가는 그런 시기였다. 새로운 목표와 포부로 가슴 설레던 매 해의 생일과 달리 22살이 되던 그 해 봄, 나는 스스로 즐거움을 금기시했다. 기뻐해서도, 행복해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슬픔과 죄책감에 그의 인터뷰와 일기를 외울 때까지 읽었다. 매일 그를 생각했다. 웃다가도 그의 생각에 금방 울기도 했다.
푸릇한 봄 바람 속에서 홀로 잿빛이었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만돌이가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할까? 한심하게 볼까? 음… 생각보다 냉철한 만돌이는 분명 한심해했겠지. 그럼 내가 뭘 하면 만돌이가 좋아할까?
그가 떠난 빈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조금씩 구멍을 빠져나왔다. 그가 남긴 선물은 바로 이거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는 것. 할 수 있는 일을 깨닫는 것. 그의 선물을 받고 나니 같은 병명으로 함께 병동에 입원해있던 어린 친구들을 안타까워했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선명해졌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고생하는 친구들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만돌이가 좋아할 만한 일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나도 만돌이와 같은 마음으로 어린 친구들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념 하나로, 나는 약대생이 되었다.
만돌이가 떠나면서 내 마음에 아주 큰 빈 자리를 남겨두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내가 구멍에 빠져서 ‘기일 정도에만 기억해주는 정도’보다 과하게 슬픈 구멍에 잠겨있길 바라지 않아서, 동시에 선물을 남기고 떠난 것은 아닐까. 어떻게든 구멍에서 빠져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하지만 쉽게 선물을 찾진 않길 바라는 마음에. 너무 쉽게 찾으면 선물인지 몰랐을 테니까.
떠나는 순간까지도 선물을 남기고 간 22살의 만돌이는 나와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