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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학상

제8회 한국약사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우리 강새이, 우리 숙이

감희진

"우리 강새이 (강아지)" 통영에서 나고 자라 한평생 경상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우리 외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면 쓰던 말이다. 내가 막내딸의 막내딸이라 그런가, 우리 외할머니는 그런 나를 유난히 아꼈다. 이제는 빛이 바래고 기억이 뒤섞여 버렸지만, 나 어릴적 우리 외할머니집은 노랗고 붉고 갈색의 따뜻한 색으로 몽글하게 기억이 난다. 해운대의 바닷바람이 일렁일렁 창문을 두드리는 외할머니 집의 커다란 문을 돌려 들어가면, 거실 벽 액자에 외할아버지의 독립 유공자 훈장들이 걸려 있었고 우리 외할아버지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 유공자 훈장을 받을 때를 녹화한 비디오가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되어 재생되는 거실 테레비가 보였다. 테레비의 멀끔한 양복 사내는 어디 가고, 안방에는 폐암으로 산소 호흡기 마스크를 끼고 숨을 색색 힘겹게 쉬는 외할아버지가 누워있다. 보일러가 들어오는 노란색 바닥 장판 위에 배를 댄 채 엄마무릎을 베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외할머니와 엄마는 어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입을 삐쭉한 채로 외할머니 얼굴이 보고 싶어 고개를 살짝 돌리면 안방 한쪽 벽면에는 예수님이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이 보였다. 예수님의 갈색 머리에 빙 둘린 노랗고 붉은빛 때문에, 외할머니 집이 그런 색깔의 느낌이었을까. *** 꽃다운 열넷의 소녀는 전쟁통에 결혼하여 남자 둘 여자 셋을 낳았다. 우리 엄마는 그중 넷째이자 여자 형제 중 막내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넷째도 딸이 나와 우리 엄마가 미워 일주일간 젖을 안 줬단다. 옆집 아줌마가 이러다가 애 죽는다고 울 힘도 없는 아이를 얼러 겨우 살아남은 아기는, 어렸을 때 젖을 못 먹어서인지 몸이 늘 약했다. 외할매는 막내딸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 큰아버지가 계묘년에 태어났다고 계숙이라 이름 붙였다. 엄마는 하고많은 이름 중에 계숙이가 뭐냐고 큰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름을 외자로 부르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엄마는 숙아, 계야라고 불렸고 가끔은 계똥이라고 불렸다. 외할매는 기어코 아이 하나를 더 가져 막내아들을 얻었다. 돈 없고 가난하던 시절에 먹여야 하는 입은 다섯인 집이라, 우리 엄마가 밤에 공부한다고 불을 켜두면, 외할머니는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타박하곤 전등의 전기세가 아까워 불을 탁탁 껐다고 한다. 새벽같이 학교로 달려 나간 막내딸은 부산에서 최고로 공부를 잘했다. 대신국민학교부터 화랑국민학교, 대신여중, 삼성여고까지 19년을 오롯이 부산에서 보낸 막내딸은 서울에서 제일가는 대학에 갔다. 수업 옆자리 앉은 동갑내기 남자애는 그 드넓은 서울에서 엄마랑 같은 부산의 대신국민학교를 나왔다. 운명처럼 둘은 사랑에 빠졌고, 총명하고 밝던 부산 소녀는 그 곱절의 세월을 서울에서 보냈건만, 부산 사투리 하나는 그대로인 어엿한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동시에 외할머니 당신의 막내딸은 나를 낳느라 몸이 쇠해 차를 잘 못 타는 병에 걸려 당신을 자주 뵙지도 못하는 불효녀였다. 더해서 아버지 일 때문에 외국에서 잠깐 살게 되면서, 안 그래도 같은 하늘에 있어도 잘 보지 못하는데 4년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우리 엄마를 불효녀로 만든 원흉인 나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야 엄마의 부산에 대한 그리움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부산에 자주 들러 울 엄마의 엄마에게 숙이 소식을 전해주는 전서구가 되기로 했다.   2013년 추운 겨울 찾아뵌 우리 외할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막 들어온 손녀의 키가 170cm이 훌쩍 넘게 크는 동안, 단 한 뼘도 자라지 않았다. 시간은 화살과도 같아서 뽀글거리던 검은 파마는 하얀 생머리가 되었다. 해운대에 있는 작은 요양병원을 비추는 작고 빛나는 회색 불빛 같은 사람, 그게 우리 외할머니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원석 팔찌 만들기에 한창 빠져있었던 나는 외할머니 것도 만들어 내려갔다. 동대문에서 산 작은 분홍색 돌들로 만든 원석 팔찌. 별것 아닌 원석 팔찌였다. 흰색 천장, 흰색 환자복, 흰색 머리. 온통 흰색인 그곳에서 분홍색 돌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외할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치매가 외할머니를 아이처럼 만들었다. 학기가 지나고 였나, 1년이 지나고 였을까. 나는 내가 선물을 드렸다는 것도 잊고, 내려가 외할머니를 보았을 땐, 주름진 왼쪽 손목 위에 원석이 까져 빛이 바래져 있었다. 다까진 팔찌를, 할머니는 씻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잘 때나 함께했다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바랜 팔찌는 마음의 빚이 되었다. 그 마음도 잠시, 다시 서울에 올라와 바쁜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팔찌 만들기 재료도 사놓고 그 존재마저 잊어버렸다. 또 빈손으로 부산에 내려갔었다. 이젠 누런색으로 색도 바래져 내 마음도 바래졌다. 그 다음다음번 부산에 내려갈 때였나. 부산행 KTX를 놓치지 않으려 서울역 4호선에서 KTX 정거장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는데, 옆에 한 노인이 신문지 위에 팔찌와 목걸이를 팔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이거 주세요" 대충 눈으로 고른 옥색 팔찌를 사서 기차로 뛰어갔다. 외할머니를 만났다. 그 분홍색 팔찌를 쓰레기통에 넣고, 외할머니에게 내가 또 만들었노라며 거짓말을 늘어놓고 으쓱해 했다. 외할머니는 소녀처럼 좋아했다. 역시 우리 강새이 밖에 없다고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외할머니를 보러 갔을 때, 외할머니는 치매는 매우 심해진 상태였다. 외할머니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대뜸  "숙이 왔나?"라며 우리 엄마를 찾았다. 외할머니 침대 옆의 작은 서랍장의 짐을 정리하는데, 분홍색 정로환 알약들 옆에 내가 쓰레기통에 버렸던 누런색 빛바랜 팔찌가 있었다. "그래 숙이 왔다" 나는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 요양병원의 작고 반짝이던 회색 불빛은 어느 가을, 별빛으로 스러졌다. 그때부터 부산으로 가는 내 발걸음도 뜸해졌다. 현충원에 묻히면 당신 자식들이 보러오기 불편하다며, 부산의 작은 납골당에 안치된 외할아버지와 마주 보는 자리에 우리 외할머니가 있다. 나는 가끔 우리 엄마랑 그날 얘기를 한다. 우리 엄마는 당신과 내가 아무리 닮았다지만, 외할머니가 그날 나를 당신과 헷갈렸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외할머니 본인 막내딸과 관련된 사람인 건 아는데, 내 이름인 희진이가, 내 별명인 강새이가 떠오르지 않아, 떠오르는 이름은 본인 막내딸 이름뿐이라서, 본인 자식들의 이름은 무서운 치매도 잊게 할 수 없어서, 당신 이름을 불렀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 우리 엄마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에서, 빛났던 우리 숙이의 어린 시절이 맞닿아있다. 우리 엄마와 나는 꼭 닮았다. 우리 강새이, 우리 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