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마더스스토리 공모전 약사 [편지]부문

마더스상

어머니의 선물

김사연 약사

어머님이 제 곁을 떠나신 지 어언 6년이 흘렀습니다. 별리(別離)라는 단어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머님을 생각하면 시나브로 가슴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올라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불효를 후회할 땐 이미 부모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살아계실 제 효도하라던 어르신들의 말씀이 이제야 느낌표 송곳이 되어 폐부를 찌르고 있습니다. 저에게 살갑고 다정한 어머니의 추억은 없습니다. 저를 출산하고 20일 후, 6·25전쟁으로 스물넷에 홀로되신 어머니는 여성이 아니라 시골 부농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어머님에게선 맛깔스러운 손맛조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냉철하고 매정하신 분이란 기억밖엔 없습니다. 저는 생후 며칠 안 돼 대퇴부 고관절염을 앓았으나 전쟁 중이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좌측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가엾다며 혀를 찼지만, 어머니는 한 치의 동정심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허약한 제가 날아갈 듯한 태풍이 불어도 어머니는 학교에 가야 한다며 저의 등을 떠밀어 엉금엉금 기다시피 등교를 했습니다. 신열로 누워있으면 하루쯤 집에서 쉬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쓰러지더라도 학교에 가서 쓰러지라!”며 할머니의 만류를 물리치고 기어이 일꾼의 등에 업혀 학교로 보냈습니다. 어머니. 어린 마음이지만 가장 부러웠던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가족 누군가 결혼식을 한다며 조퇴를 하고 가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두 분의 고모님이 계셔 그런 날이 오겠지, 기대하며 손을 꼽았지만 역시나 어머니는 조퇴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발 비용을 아끼기 위해 중고 바리캉으로 제 머리를 깎으실 때마다 머리칼이 뽑히는 듯한 아픔으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어머니. 운동회 때마다 모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청군 백군이 바뀌면 청군 모자에 하얀 광목을 꿰매어 머리에 씌어주신 어머니.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어머니는 3년을 입어야 한다며 기장이 넉넉한 교복을 사 소매를 접어 꿰매주셨고 책가방이 터지면 안 된다며 손수 바느질을 한 번 더 해주셨습니다. 당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다녔지만 길을 가다가 못 하나라도 주워 오고 이면지를 사용하는 제 자식들을 지켜보는 지금은 피식 미소가 그려지네요. 반면에 학업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길에다 소중한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면 안 된다며 저희 삼 남매에게 중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마련해 주셨지요. 당시 통학버스는 안양, 수원, 소래포구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했고 승객이 많아 탈 수 없거나 결행이 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장애를 비관해 장기간 결석을 하고 한때는 음독까지 하며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운 적도 있습니다. 그 여파로 좋은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물려받은 농토를 팔지 않고 졸업하기 위해 휴학을 거듭하며 주경야독한 끝에 약사가 되었습니다. 약국을 하며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근검절약하며 물려받은 부동산을 잘 관리한 덕분에 자식들을 출가시킨 후 약국을 폐업하고 6년간 인천시약사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나섰습니다. 어느 날, 자원봉사자의 날 행사에서 각 사회단체장이 인천시장님과 함께 1,000시간 봉사 금장 수상자들에게 시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단상에 도열하여 수상자들을 기다리며 상패 내용을 살펴보고 있을 때 제 앞에도 수상자 한 분이 다가섰습니다. 영광스러운 얼굴이 궁금하여 고개를 드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제 앞에 서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황하지 않고 평소처럼 엷은 미소를 지으셨지요. 저는 옆에서 시상하시던 시장님께 수상자가 저희 어머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사회활동에 몰입하는 동안 어머님의 말벗조차 못 해드렸고 어머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천 지역의 큼직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은 제게 근검절약과 강인한 정신력을 물려주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습니다. 병환 중인 할머니는 약국에 딸린 살림방에 모시고 일주일 밤낮을 하얗게 새우며 마지막 순간을 지켜드렸건만 정작 어머님은 외롭게 보내드리는 불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가슴을 까맣게 태울 것 같습니다. 요즈음, 제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세상을 떠나 기억이 생소한 아버님의 빛바랜 사진과 우리 삼 남매를 안고 찍으신 20대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87세까지의 찬란한 기록을 앨범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남겨주신 또 하나의 소중한 선물을 고이 간직하며 어머니를 가슴에 품겠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2019년 여름